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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대전 - 하(下) - 完

농구와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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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5-02-23 13:58:24

 

전편에 이어 올려봅니다.

글을 쓰다 싸그리 다 날아가면서

현타가 와서 전, 중편을 한참 전에 써놓고

마지막 편을 뒤늦게서야 적게 되네요.

기다려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마지막 이야기 시작합니다.

평어체 양해 부탁 드립니다.

 

222년 6월, 촉군의 온갖 도발과 공세에도 웅크리며

존버만 하고 있던 손오의 도독 육손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공격을 개시했는데, 마치 추진력을 얻기 위해

움츠렸던 것마냥 신속한 군사 기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너무 오래 싸우지 않은 탓이었을까.

초전에 유비군 진영을 공격한 육손군은 유비군의

수비에 패퇴했는데, 육손의 부장들은 이에 이미

요충지를 점거하고 진을 구축한 촉군을 공격하는

것은 병사들을 소모시킬 뿐이며, 이 지경이 되도록

가만히 있던 육손을 비웃듯이 책망했다.

 

그러나 육손은 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본인에게 유비를 격파할 비책이 있다면서 다시

공격을 지시하는 동시에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가지고 가서 촉의 진지들을 화공으로

공격하도록 했다. 이 화공의 대상이 된 것은

촉군의 본영이 위치한 효정이었다.

이도에 포위된 손환을 구출하지 않고

오히려 이도 포위망을 회피하여 화공으로 적의

본진을 직접 타격하는 판단을 내렸는데..........

 

결과는 대성공,

이 시기 중국 현지 날씨는 건조했기 때문에

건조한 날씨는 불이 붙기 좋은 날씨였던데다

유비군의 진영은 목책(나무 울타리)이 둘러쳐져

땔감이나 다름 없었던 탓에 화공은 쉽게 성공,

 

촉의 대도독이던 풍습은 이 화공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초기 진화에 실패했고,

효정에 있던 촉군의 본진은 급작스런 화공에

당황하여 우왕자왕하다 동오의 기습공격에 

급작스럽게 붕괴, 반장이 이끄는 군사들이

촉군의 대도독이던 풍습을 쓰러트렸다.

 

순식간에 사령관이 증발했고, 군주였던 유비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패퇴하면서 효정에 있던

촉의 본진은 급작스런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정말 큰 문제였던 건,

이릉, 효정, 이도의 약 40km 범위(7백리)에

걸쳐 넓게 주둔하는 상태였던 촉의 진영을

전체적으로 컨트롤하는 헤드가 다 효정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머리가 없어져버린 것.

 

최전선 이도의 손환 포위망을 풍습, 장남이

본진이자 이도의 후방인 효정에 주둔하며

관리담독하고, 후방인 이릉애 황권이 주둔,

익주로 연결되는 통로인 자귀와 이어도록

하여 후방 연결통로를 담당하면서 연계가

이어지도록 한 진영이 중간 허리가 끊어지며

연계가 아예 붕괴되어 버렸다. 

 

수뇌부가 붕괴되어 패주하자, 자연스레

전방의 이도 포위망도 힘을 잃어버렸다.

효정 근처에서 이도 포위망을 지휘하던

부도독 장남은 효정 본영이 타격받고

패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포위를

풀고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런데 포위망을 푼 장남의 군대는

역으로 갇혀 있던 손환의 군대는 물론,

이릉 서편 주둔하며 포위망을 견제하던

한당의 군대, 그리고 근처에서 효정을

타격한 육손 본대를 피해 퇴각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에 놓였고, 장남은 이 과정에서

결국 퇴각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된다.

<주연전>에는 주연이 5천의 병사를 감독하여

유비와 싸우면서 육손과 협력하다가 '별도로

촉군의 선봉대를 공격해 격파하고 그들의

퇴각로를 막았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촉군의 선봉이라 함은 곧 장남이니, 장남은

주연의 군대에 패퇴하여 전사한 것으로 추정.

 

갇혀 있던 손환은 안에서 밖의 손오군과

호응, 포위를 풀어내고 육손과 합류했고

육손은 손쉽게 이도의 포위를 풀고 손환을

구출한 뒤, 그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유비군을 각개격파해나가기 시작했다.

 

유비의 7백리에 걸쳐 길게 늘어진

각 거점 진영들은 통합적인 지휘를 상실,

개별적으로 육손의 공격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는데, 이는 손오의 경험 많은

베테랑 장수들에겐 좋은 먹잇감이었다.

 

손오의 장수들은 경험 많은 장수들이 많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경험의 진가가

드러났고 서성은 유비의 각 둔영을 공격해서

각개격파하며 진영들을 점령해 나갔고, 육손은

손오의 본군을 거느리고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이릉까지 길게 늘어진 촉군을 타격했다.

 

촉의 수군은 오의 수군에 대응할 능력이 미약해

육손은 손쉽게 도망치는 촉군을 추격하는 동시에

늘어져 있는 유비군의 진영을 계속해서 타격,

데미지를 누적시켰고 촉군은 각 진지 별로 각기

다른 대응을 보이면서 차례대로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촉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왔던

호왕(胡王) 사마가도 전사하였고, 유비의 각

진영은 무질서한 패주와 무의미한 저항을

하다가 귀중한 병력과 물자가 다수 유실되었다.

 

포위되어 퇴로가 없어진 두로와 유녕은 항복,

정기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후퇴하다가

뒤에서 추격자가 곧 온다며 배를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도주하라고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것을 무시하고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촉군은 붕괴되어

풍습, 장남, 두로, 유녕, 정기 등의 주력 장수

다수를 잃어버린 상황이었고, 후방에 위치한

황권과 연계하기도 어려운 최악의 상황까지

몰려버렸는데, 유비는 이대로 가다간 모두

전멸당할 것이라 생각해 형주에서 익주로

들어가는 입구 초입인 마안산 일대까지 후퇴,

패잔병과 그곳의 주둔병을 모으며 산 위에

올라서 방어선을 구축해 적을 막으려 시도했다.

 

각 군대를 인솔, 강을 통해 북진하며 40여곳의

진지를 격파하며 유비군 주력을 섬멸한 육손은

유비의 대응을 보고는 병력의 우위와 기동성을

살려 사방에서 마안산을 포위, 정신 못차리는

유비군을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타격했고

유비는 마안산에서도 대패하면서 자귀로부터

가지고 나온 병력 거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형주 방면으로 나간 촉의 4만은 괴멸했고,

남아있는 병력들도 오에 대부분 다 투항했다.

 

유비는 마안산에서 도주하여 자귀에 간신히

도달하였으나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손오의

군대와 깃발들이었다. 마안산에서 계속해서

유비를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추격해온

육손의 군대는 그동안 갇혀 있어 유비에 대해

한이 깊던 손환이 선봉을 맡아 이 악물고 진격,

빠르게 진공해 유비의 길과 탈출로를 먼저 와서

사전에 죄다 차단해버렸고............

 

육손은 본군을 이끌고 뒤를 따르면서 잔여

유비군 진영들을 섬멸하고 각 거점을 역으로

땅따먹기하면서 계속 올라갔다. 유비는 결국

자귀에서 백제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수단인

배를 포기하고 험한 산길을 택해서 탈출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 볼 점이 있다.

육손은 효정에서의 첫 공습을 성공시킨 후

퇴각하는 유비군을 빠른 속도로 추격했다.

그리고 마안산에서 패퇴한 유비의 퇴로를

차단한 것은, 유비가 완전히 포위한 채로

공세를 퍼붓고 있던 손환의 군대였다.

 

손환은 효정에서 유비의 본군이 패퇴하자

이도의 포위가 풀리면서 육손과 뒤늦게

합류했다. 그럼에도 손환이 선봉에 서서

퇴로를 막았단 말은, 패주하는 유비군의

이동속도보다 육손 본군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보병인 유비군보다 빠른 기동이 가능했던 것.

 

그리고 이는 한 가지를 더 시사한다.

유비군의 수군이 건재해 강의 요충지를

점거하고 있었다면, 육손의 손오 본대 역시

이 수군과 교전했어야 했기에 설사 수군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다 한들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유비는 마안산에서 패잔병을

수습해 자귀로 들어가 탈출할 시간을 버는 것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별 방해 없이

육손과 손환이 유비군을 추격했다는 점과,

유비가 배를 포기하고 산길로 탈출했다는 점에서

수군은 사실상 무쓸모에 가까웠단 결론이 나온다.

 

유비는 밤을 틈타 간신히 도망친 다음 자귀에 이르러

군사를 재수습했으며 패잔병과 자귀 일대에 남아있던

병력을 모았으나 자귀도 그대로 손오군의 공격을

받았다. 강 상류 쪽에 위치한 진영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올라간 선봉 손환의 공격을 받아 영안으로 가는

길이 막혔고, 자귀의 진영은 육손 손오 본대가 공격,

유비는 마안산에서 이미 패퇴한 마당에 자귀에 남은

패잔병과 예비 병력들로는 승세를 타고 진격해오는

육손의 군대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귀에서도 유비군은 대패했고, 온전히 남아있는

진영이 상총의 진영 단 하나뿐이라고 기록되었을

정도의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왕보는 이 자귀에서

손오의 군대에 전사했으며, 유비는 결국 그나마

진영을 온전히 유지한 상총의 부대, 그리고 배를

버리고 오반, 진식의 수군 잔존 병력 등 남아있는

병력을 영끌해서 가까스로 병력을 확보했고,

적의 추격을 막고자 후미에 부융을 남겼다.

촉의 충신이었던 용맹한 장수 부융은 손오군이

항복을 권해도 '한의 신하는 오나라의 개들에게

항복치 않는다' 며 끝까지 옥쇄하다 전사,

부융이 분전하며 최후까지 싸웠던 덕택에, 

유비는 가까스로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유비는 약 200km를 산길로 도망가서 백제성

인근까지 이르렀고, 일부 역참의 관료들이

유비를 맞아들이면서 꽹과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우고 유비군의 갑옷 등을 더해서 불길을

거세게 만들어 추격군을 막아냈는데, 덕분에

유비는 구사일생으로 백제성에 입성하면서

일국의 군주가 사로잡히는 치욕은 면했다.

 

이릉대전 - 하(下) - 完

 

자귀에서 유비군을 대파하고 자귀 일대를

확보한 손오의 군대는 백제성 인근까지

유비를 추격해 왔는데, 영안의 바로 근처

남산 일대까지 이이와 유아의 군대가 이르러

강주에 있던 조운이 유비를 맞이하기 위해

급하게 영안으로 출발했을 정도로 유비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서성, 송겸, 반장을 비롯한 오의 제장들은

그대로 더 추격해 유비를 사로잡을 것을

건의했으나 육손은 더 깊숙히 들어간다면

위가 움직일 수 있다며 이를 만류했고 이런

육손의 뜻에 주연과 낙통 등이 찬동하면서

손오는 더 이상 유비를 추격하지 않은 채

물러났다. 목숨을 부지하게 된 유비는 다시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쳐 이 지역은 영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릉대전 - 하(下) - 完

 

222년 8월. 오군이 촉군을 격파하자 북부에

주둔하다 퇴로가 끊긴 황권과 사합은 결국

북쪽에 위치한 위에 투항했다. 조비는 이에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며 그들을 환대,

황권을 시중 진남장군에 배수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그날로 수레에 배승하도록 하였다.

사합 등 42인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며,

장군, 낭장이 된 것이 100여인에 달했다.

이는 촉의 유능한 인재 유출과 동일한 말이었다.

 

그리고 또다른 비보가 전해졌는데, 무릉만이의

협력을 얻고자 파견되었던 마량이 죽었다는

소식이 촉으로 들어온 것. 백미라 불리던

마씨오상 필두의 죽음이었다(향년 36세)

 

마량을 누가 죽였는지는 기록이 없는데,

무릉만을 견제하고자 파병된 보즐의 군대보단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무릉만이들이 마량을

죽인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보즐이 이끄는

오군이 무릉만의 병력을 격파하고 마량을

죽였다면 기록이 남았을 것인데, 없기 때문에

아마도 마량에게 책임을 물어 손오와 갈등을

피하려고 한 무릉의 만족들이 죽인 것으로 보인다.

 

222년 10월, 육손은 손권의 명을 받아 다시 화친을

제의하고, 유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화친이 성립,

이릉대전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화친을 처음

제의한 것은 손권으로, 12월까지 사신이 상호간

오고 갔는데, 손권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이미

손오가 승자이기에 아쉬울 것이 없어 손을 내민

것도 있었지만, 더 큰 원인은 조비가 우려대로

남하를 개시하며 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 적의 적은 친구인 것

 

이 와중에.....

유비는 위나라 군대가 대거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적군은 지금 벌써 강릉에 있소.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짐은 다시 동쪽으로 갈 것인데, 장군은 이에 동의하오?'

그러자 육손은,
'단지 걱정되는 것은, 폐하의 군대는 방금 패배하여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며, 양국의 화친 관계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보충해야
하지 병력을 궁핍하게 할 틈은 없습니다.
만일 십분 헤아리지 않고 다시 뒤엎어지는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을 멀리 파견하여 오게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비록 유비가 대패하면서

물러났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다시 군을

일으켜 동진할 경우, 위와 촉 양면전선이

형성되어 손오가 위기에 처하게 될 터인데

이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제의했다.

 

손권이 사신으로 보낸 자는 정천이었는데,

이 기록을 잠시 보면.......

 

(정천은)사자로서 촉(蜀)나라에 가게 되었다. 유비(劉備)가 물었다.

 

"오왕(吳王 ; 손권)은 어찌하여 내 글에 답하지 않는 것이오?

내가 정명(正名 ;칭제)한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오?"

 

정천이 말하였다. 

 

"조조(曹操) 부자가 한실(漢室)을 능멸하더니, 끝내 (천자의)

지위를 빼앗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하(殿下 ; 유비)께서는

종실을 이어받아 적통의 책임이 있음에도 창을 쥐고 몽둥이를

들어 해내(海內)에서 솔선하지 않고 스스로 이름하였고(自名), 

천하의 일이 아직 논의되지 않았으니 저희 임금이

아직 답신을 드리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유비는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정천은 이후 편지를 써서 손권에게 보냈고,

손권은 편지를 받아보더니  유비가 잘못을

뉘우치는것 같다면서 한이 멸망했으니

한중왕이라 칭할 만하다고 유비를 띄워주는데,

원래 유비와 싸우던 시기 조비에게 칭신하며

조비를 띄우고 유비를 역적으로 취급하던 기존의

손오와 손권의 태도가 변화하게 된 것.

 

이는 손권이 조비와 싸우기 전에 유비에게

촉이 위&조비와 대적한다면 촉한이 한실정통,

칭제한 것을 인정하겠다고 뜻을 밝힌 것이었고

유비는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칭제하고 촉한을

건국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할 이유가 없었기에

손권의 제안에 동의하면서 그렇게 이릉대전은

12월 화친하면서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유비는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계속 백제성에 머물다가 223년 4월,

제갈량과 이엄을 탁고대신으로 삼아 아들

유선을 보좌하게 한 뒤 눈을 감으면서

유비도 이렇게 역사에서 퇴장(향년 63세)

 

유비의 유언은 연의에서 나오듯이

유선을 돕되, 능력이 되지 못하면 그대가

나라를 취하라는 내용이었고,

 

이 외에도

 

"착한 일을 작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악한 일을 작다고 하면 아니 된다"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오직 어질고 덕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 이 아비는 덕이 부족하니,

부디 나를 본받지는 말거라."

 

이 말은 <소학>, <명심보감> <자치통감>에

남아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평생을 인의로 살아오며 조조와는 반대의

입장으로 성공했던 유비, 본인의 본심은

어떻던 간에 참고 인내하고, 때로는 음흉하게

속이면서 본인의 국가를 세우고 이미지를

쌓아왔던 그는 마지막에 결국 참지 못했다.

 

부하들의 말대로, 해서는 안될 전쟁이었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면, 결코

일으켜서는 안될 전쟁이었으나 유비는 평생을

함께 한 전우의 복수라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릉대전 - 하(下) - 完

 

여기서 대다수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했던

판단의 대가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촉한의 2세대는 싸그리 다 날아가버리며

엄청난 인재 유출이 발생했고, 병력과 물자

상당수를 상실하면서 국력이 쇠약해졌으며,

이 때를 틈탄 내부의 반란과 소요가 커졌다.

유비 본인도 결국 이 전쟁 패배에 대한 현타와

상실감이 죽음을 앞당겼으니, 최악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 결과는 훗날 촉 멸망의 트리거가

되는 스노우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본인이 세운 나라에 최악의 해악을 끼친 이 결정이,

아이러니하게도 유비와 관우, 장비라는 사람들의

서사를 완성시키고 유관장의 의리만큼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 낭만 그 자체로 전설이 되었다.

 

이릉대전은 유비의 실패이자 완성으로,

삼국지와 자신을 역사에서 불멸의 존재로 남겨

후대에 두고두고 알려지게 되었으니

이것도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6
댓글
halath
2025-02-23 22:42:17

👍

숄더페이크~!!
2025-02-23 23:02:05

도원결의 마지막 편..

이릉대전  

♨MIAMI-ODOM
2025-02-23 23:34:06

꿀잼입니다. 

AIMac
2025-02-23 23:59:27

역사에서 부하를 잃은 것에 분노해 전쟁을 일으킨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걸 생각하면 님 말씀대로 유비의 동오정벌이 있기에,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제갈량의 출사표와 북벌이 있기에 유비 집단의 이야기가 천팔백년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만약에 이릉에서 이겼으면, 제갈량이 북벌을 성공시켰으면 지금같은 강렬한 임팩트는 없었을 것도 같네요. 

hwanny1723
1
2025-02-24 01:12:59

네이버 부흥까페에서 "황XXX"이란 분의 이릉대전에 대한 가설 연재글이 있는데, 매우 흥미롭고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글인데, 링크를 해도 될지 몰라서 아쉽네요.

바이스시티
Updated at 2025-02-24 14:01:22

마지막 문단에 십분 공감..

 

사실 어렸을 때는 저 즈음에 관장유 다 죽고 이게 뭐야 ㅜㅠ 했었는데, 거기에 나중엔 오장원의 제갈까지..

 

촉한정통론이니 조위정통론이니 해도, 다른 글에도 언급했지만 결국 역사부도에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밖에 나오지 않는 듣보잡 짧은 시기인데, 낭만이라도 챙겨 수천 년을 기억되는 그들이 진정한 승자죠.

 

근데 진짜 찐인 건 유관장이 그랬는데, 그 후대인 제갈량이란 양반도 비슷한 느낌으로 1대 낭만을 아득히 능가해버리는 2대 낭만으로 비극의 진주인공이 돼버렸으니..

 

윗 댓글 중에 부하의 죽음에 분개해서 전쟁을 일으킨 예가 없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더해 요순 시절도 아닌데, 죽을 때 유지를 받는 부하에게 자신을 이으라고 한 양반도 아마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어요. 유비라는 양반의 그런 점이 저 집단의 치사량 낭만을 유지하게끔 했겠죠.

 

그걸 제갈량은 출사표라는 명문으로 또 후세에 박제를 했고.. 참.. 여러모로 대단한 집단입니다.

 

건안 7자의 문재가 유명했고, 역사에도 남았지만, 제일 유명한 명문으로 길이 남은 건 거기에 속하지도 않는 제갈량의 글인 것도 아이러니 하죠. 결국 낭만이 모든 것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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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움해체이장석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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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달리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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