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00 : 00
자동
Free-Talk

역사 탐구: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 - 상(上)

농구와 야구
8
  1070
Updated at 2025-02-23 13:34:04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를 해보셨던 분이라면,

최고의 결혼 상대로 뽑는 신부감 후보가 있습니다.

 

역사 탐구: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 - 상(上)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3, 1066년 시나리오 中

 

저기서 여공작 마틸다라고 써 있는 여성이죠.

카노사(Canossa) 가문 출신 여성으로, 직위는

토스카나의 변경백. 

 

그녀는 어린 시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가문이 멸족되었으나 홀로 살아남아, 북이탈리아의

실권자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하인리히 3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에게 복수를 한 뒤 천수를 누렸던 여걸.

 

잠깐 카노사 가문의 배경을 언급하면...

 

역사 탐구: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 - 상(上)

 

토스카나에 위치한 도시 루카

 

10세기 초반, 루카 백작령 출신의  하급 귀족

시지프레드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자금을 이용,

주변의 일부 토지를 구매하며 파르마 인근과

아펜니노 산 일대까지 영향권을 넓혀갔습니다.

 

그 뒤를 아들 아달베르트 아토가 이어받아,

레지오의 주교인 아데랄드의 근위병으로 근무하다가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2세가 가르다 성에 가둔

아들라이드를 구출, 본인들의 거성인 카노사 성에

이송시켰는데 이는 후에 보답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베렝가리오 2세를 물리치고 새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이탈리아 국왕이 된 사람이.........

 

역사 탐구: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 - 상(上)

 

신성로마제국 오토 왕조 초대 황제,

오토 1세(대제)

 

오토 1세는 부르고뉴의 아델라이드와 재혼한 뒤,

부인을 도와준 카노사 가문의 아토에게

레지오 에밀리아와 모데나 백작령을 수여합니다.

그렇게 수여받은 레지오 에밀리아 남서쪽 산기슭에

카노사 성채를 건설하여 자신들의 새로운 거성으로

삼은 카노사 가문은, 거성을 중심으로 북이탈리아에

영향력을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토지 구입이나 상업 활동을 통해 자산을 

창출하는데 재주가 뛰어났고, 특히 영주, 교회 등

지역 기득권과 권력자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실력을 보여

사방으로 명성이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그러자

지역 권력자들은 카노사 가문과 연줄을 맺으면서

혼인 관계로 묶었고, 이렇게 든든한 뒷배를 확보한

카노사 가문은 뒷배를 이용해 정적들을 몰아내고

재산을 빼앗는 등 힘을 계속 키워나갔습니다.

 

아달베르트 아토의 아들 테달트의 시기에 이르자

만토바, 브레시아, 모데나, 페라라, 레지오라는

북이탈리아 5곳의 영역을 확보한 백작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보니파초 4세 시기에는 커진 세력을

바탕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부 정치에도 개입해,

황제 하인리히 2세의 편을 들어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든 영주들을 앞장서서 제압.

 

이 공적으로 하인리히 2세의 후를 이어 즉위한

콘라트 2세에게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서

토스카나 변경주의 변경백으로 선임되었습니다.

1043년에는 이어서 스폴레토 공국과 카메리노 백국,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주요 영지를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북이탈리아 전체에서 포 강 근처

롬바르디아 일대부터 토스카나, 스폴레토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에 해당되는 땅이었으며,

북이탈리아 핵심 귀족이자 실권자가 된 카노사 가문.

 

보니파초 4세는 베르가모 궁전백 기젤베르트 2세의

딸  리칠데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1034년에서 1037년 사이에 리칠데가 사망한 뒤,

그는 상로렌 공작이자 바르 변경백 프리드리히 2세의

딸이며 콘라트 2세의 황후인 슈바벤의 기젤라의 조카

베아트릭스와 재혼했는데, 베아트릭스는 페데리코,

베아트릭스, 마틸다 세 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역사 탐구: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 - 상(上)

 

오늘 적어볼 이야기는,

마틸다(Matilda) 이야기.

 

마틸다는 1046년경에 출생했습니다.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는 막내로 출생한 마틸다는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집안의 막내딸로

사랑받으며 유복하게 자라던 중에, 아버지인 보니파초

4세가 1052년 사냥 도중에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피살,

졸지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고, 오빠인 페데리코가 뒤를

이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는 동시에 어머니였던

베아트릭스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정리되는 듯 했죠.

 

그러나 북이탈리아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카노사 가문을 껄끄럽게 여겼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페데리코의 직위 승계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이 기회를 틈타 영지를 몰수하려는 기미를 보였고,

이를 눈치챈 베아트릭스는 1054년 중반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상 로렌 공국을 빼앗긴

고드프리트 3세와 재혼하며 황제에게 적대했습니다.

 

하인리히 3세는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의 결혼은

자신의 허락 없이 이뤄졌으니 유효하지 않으며,

황위에 도전하려는 음모라며 분노하여 비난했고,

이어서 군대를 이끌고 카노사 가문의 심장부인

피렌체까지 진격해와 베아트릭스와 페데리코,

그리고 마틸다를 체포해서 독일로 끌고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페데리코가 끌려가던 중 병사하면서

카노사 가문은 후계를 이을 남성의 대가 끊겼고,

여성인 베아트릭스와 마틸다만 남게 되었죠.

 

이 소식을 들은 베아트릭스의 남편 고드프리트 3세가

황제를 피해 로렌으로 달아난 뒤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황제에게 대항하려 했습니다. 

하인리히 3세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던

중에 1056년 10월,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어린 아들

하인리히 4세가 즉위,  섭정을 맡은 하인리히 4세의

모후 아그네스는 고드프리트 3세가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고드프리트와 베아트릭스의

결혼을 승인, 베아트릭스와 마틸다를 석방했습니다.

 

석방된 마틸다는 언니인 베아트릭스마저

사망하면서 유일하게 하나 남은 카노사 가문의

사람이 되었고, 1057년 토스카나에 돌아온 뒤

본인 가문의 직위였던 변경백에 취임했습니다.

여성 변경백의 탄생이었죠.

어머니 베아트릭스와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섭정을 맡아 그녀를 지원했습니다.

 

베아트릭스와 고드프리트 3세는 이미 본인들고

결혼했지만, 자신들의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켜서

로렌 가문과 카노사 가문의 동맹을 강화하기로

하여 1069년, 마틸다는 계부 고드프리트 3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고드프리트와 결혼하는데,

그는 '꼽추'라는 별칭으로 불렸을 정도의 추남.

고드프리트 3세가 직후 사망하자 꼽추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드프리트 4세로 직위를 상속받았고,

마틸다는 남편을 따라 로렌으로 이동, 로렌에서

거주하면서 어머니인 베아트릭스에게 자신의 영지인

토스카나의 지배권을 양도했습니다.

 

마틸다는 1070년에 임신, 1071년 1월 초에 딸을 낳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 베아트리체로 지었지만, 불행히도

딸이 얼마 살지 못하고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겪은 마틸다는 원래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던 남편과 불화가 더더욱 심해졌고, 그녀는

1072년 1월, 로렌에서 탈출하여 만토바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에게 달아난 뒤 안드레아스 수도원에 은거합니다.

 

아내가 달아나자 남편 고드프리트 4세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토스카나의 여러 곳을 방문,

마틸다의 남편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당시 루카에 머물고 있던 마틸다가

만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재회에 실패했습니다.

마틸다는 1073년 여름 고드프리트가 로렌으로

돌아가자 교황청에 결혼을 무효로 선고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황청은 로렌 공국이 친 교황성향인

것을 이유로 그녀의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결혼을 파기하지 못한 마틸다는 그대로

토스카나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075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 간에

주교 서임권을 두고 분쟁이 발발했던 것.

마틸다는 이 참에 교황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교황의 편에 섰는데, 친 교황파였던 로렌 공국의

남편 고드프리트 4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 편에

서서 부부는 상호 적대진영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고드프리트는 하인리히 4세의 작센 원정에 참여,

작센 공작 마그누스와 맞서 싸우는 등 황제를 도와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1076년,

의문의 암살을 당했고, 마틸다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던 그의 후계는 단절, 원칙대로라면 마틸다가

로렌 공국을 상속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러나 이를 예상이라도 한들, 본인을 떠나간

아내에게 자신의 공국이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여겼는지 고드프리트는 암살되기 전에 본인의

조카 고드프루아를 후계자로 지명해 로렌 공국을

상속한다는 유언서를 남기면서 마틸다는 로렌을

물려받는 것에는 실패했습니다.

거기에다가,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린 아들 콘라트를 로렌 공작에 세우고 섭정을 두어

로렌 공국을 줘버렸기 때문에 교황파에 섰던 마틸다는

로렌을 애초에 받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담이지만, 고드프루아는 유언의 내용을 주장해서

황제에게 1088년이 되어서야 승인받아 로트링겐 공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이 영지를 바탕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난 고드프루아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핵심으로 활약,

훗날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남편이 저러고 있는 동안 마틸다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마틸다는 토스카나로 돌아온 뒤

수녀원에 은거하면서 한 추기경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힐데브란트 추기경이었는데, 이 추기경이 1073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즉위하면서 대박이 났습니다.

 

교황은 교회 개혁을 주장하며 본인의 강경한 주장을

밀어붙였고, 마틸다는 친분이 있던 교황을 지지하며

본인의 영향력과 세력권을 이용, 교황을 도왔습니다.

그러던 중 서임권을 놓고 교황과 황제가 충돌하며

분위기가 최악이 되어가던 1075년 12월 하인리히 4세가

로마에 무장 사절을 보내 그레고리오 7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고, 마틸다 모녀를 비롯한 교황 충성파가 즉각

군대를 동원하여 교황을 구출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기껏 사로잡은 교황을 맥없이 놓친 하인리히 4세는

1076년 1월 24일 보름스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금인칙서 지정 유력 주교인 마인츠의 지그프리트 대주교,

트리어의 우도 대주교 및  24명의 다른 주교들 앞에서 

 

"교황이 낯선 여성과 탁자를 공유하고

필요 이상으로  친밀하게 수용하고 있다",

"교황이 여자를 원로원에 들여보냈다" 면서

교황을 비난하고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베아트릭스와 마틸다 모녀가 그레고리오 7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겨냥한 것.

그러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이에 맞서 1076년

2월 15일에 하인리히 4세를 파문,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를 풀어주는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금지합니다.

 

1076년 4월, 마틸다의 어머니 베아트릭스가

사망하면서 마틸다는 토스카나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사건이

발발합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제후들이 파문당한

황제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뒤에, 본인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교황에게 겨울이 되면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열 것이니 이 회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이미 사로잡혔던 경험이 

있어, 안전한 이탈리아를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황을 설득한 것이 마틸다였습니다.

마틸다는 교황을 설득해 회의에 참석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했고, 교황은 마틸다의 조언을 수용하여 12월에

마틸다와 함께 회의가 열릴 예정인 트레부르(Trebur)로 출발.

 

그런데.........

1077년 한겨울이던 1월 초,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롬바르디아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황제가 교황에게 굴복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교황과 마틸다는

마틸다의 본거지인 카노사 성채로 경로를 변경,

그곳에서 황제를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 앞에 나타난 하인리히 4세는

강추위를 무릅쓰고 참회복을 입고 맨발로 선 채 성문이

열릴 때까지 대기하는 강수를 뒀습니다. 이미 황제에게

잡혔던 경험이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자신을

잡으려고 술수를 부리는 것이라 여겨 면담을 거부했지만,

하인리히 4세는 성문 앞에서 무릎 꿇은 채 3일을 존버.

 

황제가 3일간이나 강추위에도 밖에서 버티는 것을 본

마틸다는 성직자들과 함께 하인리히 4세를 만나보라고

권고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마침내 황제를 성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 앞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 복종의 의미를 표현했고,

이에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위에서부터 읽어 내려오신 분들이라면

'카노사' 라는 가문 명을 듣고 카노사? 분명

서양사 어디서 봤던 거 같은데 싶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 이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네, 익히 알려진 '카노사의 굴욕' 입니다.

 

역사 탐구: 중세 이탈리아 최고의 여걸 - 상(上)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

 

교황이 (아빠스:대수도원장)에게 탄원하다/마틸다에게 부탁하다.

카노사의 굴욕을 묘사한 그림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의 면담을 주선하며

본인이 능력 있는 인물임을 과시했던 토스카나 변경백

마틸다는 광활한 영지를 순회하고 여러 교구에 자금을

기부하며 통치 행위를 성공적으로 해 나갔습니다.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새 황제로 추대했는데, 파문을 철회했던

교황은 루돌프의 지지를 철회하고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가 1080년에는 다시 입장을

번복해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하는 등,

갈 지자 행보를 하면서 신임을 잃어갔습니다.

 

그러나 카노사의 굴욕을 겪으며 속으로 와신상담,

힘을 키우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호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독일 내 제후들과 주교들의 지지를 확보한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 새로운 교황인

클레멘스 3세를 받들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면서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가 마틸다와 간통하고 있다며

교황과 마틸다를 대놓고 적으로 선포했죠.

 

그렇게 마틸다는 황제와 2라운드를 치르게 되는데.....

 

-하(下)편에 계속됩니다.

2
댓글
halath
2025-02-23 22:44:35

👍👍

hwanny1723
2025-02-24 01:26:41

크킹3에서 봤는데,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이군요.

댓글 남기기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04:44
1
168
부산-달리기-수영
01:58
 
178
Ko8e24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