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유방)와 제갈량의 비슷하지만 다른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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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드립에서 퍼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갈량과 유방의 북벌에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기원전 한고조가 삼진을
제패한 예를 들며 제갈량의 군재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분들이 많은데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말 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정보가 있다거나 다른의견이 있으시면 댓글 달아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설명드리기에 앞서 한중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요 항우는 함양을 힘으로 뺏은뒤 팽성을 수도로 삼고 18제후왕을 임명합니다 이때 유방이 받은 지역이 파촉 한중(남정) 이며 이는 방계중에서도 쩌리인 유비가 훗날 한중을 점거 한중왕에 올라 한漢 을 잇겠다는 명분이 됩니다.
유방은 당시 오지인 한중과 파촉 지역의 왕에 임명된 것 에 분노하고 기원전 206년 북벌을 감행합니다 자오도 기산도로 조공을 보내고 주공은 진창도로 보내 이후 점령 유방을 견제 하려고 임명한 장한은 격파하고 사마흔과 동예의 항복을 받으며 관중지역을 짧은 시간에 점령합니다 제갈량과 차이가 있다면 제갈량은 주공 조공이 확실한 반면 유방군은 기산도 진창도 자오도 전방위적으로 공격했다는 점 그리고 유방은 수로보급이 수월했던 반면 제갈량은 기원180년 경 무도 대지진으로 인해 수로가 끊겨 보급이 어려웠다는 점 입니다(보급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는 제갈량이 목유 유마를 발명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차이점들은 뒤로하고 비교적 역사에 관심이 적은 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제갈량이 못한 수 차례의 북벌은 한고조는 한번에 성공했으니 제갈량은 내치는 탁월하나 용병은 형편 없던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은 합리적이며 글 시작에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유방의 세력은 10만에서 3만+ 로 약해졌지만 항우보다 먼저 함양을 점거했던 즉 항우 다음가는 군사력이었고 유방을 막아야 하는 장한은 신안대학살로 그 군세가 많이 꺾여있었으며 이 북벌책임자 에는 한신이 있었습니다 또 남정(한중) 틀어박힌 유방은 반년도 안되어서 진출한 반면 촉은 유비 사후 5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이점은 유방이 삼진을 제패한 ‘선례’가 있는 만큼 위군도 최소한 관중쪽만은 방비 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제갈량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농서 진출시 위군의
방비가 허술했다 하는 즉 기산 진출을 예상 못한 시그널이 많은데 이는 유방의 사례가 있으니 위군장수들도 주공은 진창이고 조공은 자오도 ,기산도 일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조공(조운)을 기곡방면으로 주공이 올거라고 예상되는 진창방면과는 다르게 주공을 기산으로 돌리며 관중에서 옹주로 올수있는 거의 유일한 길(대로는 유일)가정에는 마속을 파견 , 위군 주력을 묶어두고 옹주를 도모하는 그림을 생각하고 이는 가정에서 마속이 패하기전 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장합에게 패하며 북벌은 사실상 끝이 났으며 호응한 천수 안정도 모두잃고 복귀합니다. 여담으로 이때 북벌 실패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훗날 강유 북벌때엔 장안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전략은 시도조차 못하고 농서방면 진출밖에 못하게 됩니다.
먼저 제갈량을 변호 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자면 당시 촉에 비해강군이었던 위군해 반해 유방은 본인이 강군인 입장이며 그것도 제후국 상대라는점 수로보급이 원활했던 유방에 반해 제갈량은 수로가 끊긴 상태라는 점 유방의 전례가 있던 공격이었기에 위나라의 방비가 갖춰졌던 점 등이 있기에 한번의 패배가 치명적인 당시 소국의 입장에서 기산으로 우회 침공은 제일 안전하고 확실했던 루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입장으론 마속을 빼고 생각 하더라도 단순 병의 숫자로 우세에 있던 제갈량이 방비가 허술한 옹주를 점거 못했던 건 분명 본인 책임이 크다고 생각이 듭니다 또 자오도 계책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위연이 한고조의 고사를 예로들며 말한 것 처럼 꼭 자오곡 방면 진출이 아니더라도 다른 루트로의 조공 운영을 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용병에 있어서는 사마의 장합 곽회 비요 왕쌍등을 격파한 공이 있기에 쉽게 평가 할 수 없는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나무위키에 등재된 진수의 평을 남기고 마치겠습니다.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소하와 비교할만 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應變) 장략(將略)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p.s 글을 다시보니 오류가있습니다 제갈량의 조공(조운)은 진창도가아닌 기곡도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주공은 진창도로 올거라고 조진은 생각했을테고 제갈량은 이걸 이용 기산으로 우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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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군사적 능력은 중국 역사 통틀어서 낮게 잡아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드는 양반이라.. 대신 정치와 처세가 0점...
제갈량은 소하, 장량 역할 했다 보고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다는 표현이 적절할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