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대전 - 전(前)
평어체 양해 부탁 드립니다.
관우는 위와 오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촉은 형주를 상실했고, 동오는 그동안 눈독들이던
형주를 손에 넣었다. 이 소식은 유비에게도 전해졌고,
유비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못했다.

유비는 그동안 많은 세력 휘하에 들어가면서
수모를 당했음에도 참으면서 실리를 추구했고
인고의 시기를 버티고 버티며 나라를 세웠다.
그렇게 속내를 숨기면서 인생을 살아왔던
유비는 오랜 전우이자 동업자였던 관우의
죽음만큼은 끝내 참지 못한 것이다.
유비 휘하의 신하들은 모두 오를 치는 것에 반대했다.
진밀은 천시로 보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라며
유비에게 간언했고, 유비의 숙장인 조운마저 나서서
위를 쳐야 한다고 간언하며 이를 막아서려 했다.
손권이 형주를 침범하자 선주는 대노하여 정벌하려 했다.
조운이 간하여 말했다. "국적은 손권이 아니고 조조입니다.
먼저 위를 멸하고 오는 스스로 항복하게 해야 합니다.
조조가 죽었지만 아들 조비가 한나라를 찬탈했습니다.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을 도모하여 황하와 위수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의 뜻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서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를 놔두고 먼저
오나라와 싸우시면 아니되옵니다. 오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는 듣지 않고 동쪽(오)을 정벌하러 진격했는데
조운은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선주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안에 이르렀지만
오의 군대는 이미 물러난 뒤였다.
-삼국지 조운별전 中
유비는 즉위식을 올리고 황제로 즉위한 뒤
221년, 끝내 오를 공격할 것을 결정했다.
반대하는 진밀은 하옥했고, 조운은 강주로
보내서 후방을 감독하게 하면서 본인의 뜻을
확고하게 드러냈다. 제갈량 역시 오를 치는 것에
반대했으나 유비의 뜻이 워낙 확고했기에 끝내
이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제갈량은 이에 크게 탄식하면서 법효직이
살아있었다면 어떻게든 유비를 설득해서
동쪽으로 가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는데
효직은 법정의 자, 법정은 이 시기에는 이미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장비와 황충을 잃어버린 유비는
이미 죽은 관우를 포함해서
군을 이끌 사령관을 셋을 잃었다.
전장군 관우
좌장군 마초
우장군 장비
후장군 황충
유비가 한중왕 등극 후 임명했던
사방장군 중에 3명을 잃어버리면서
남은 건 좌장군 마초 한 명 뿐이었다.
그럼 마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마초는 이릉대전에 참가하지 않았고
이에 마초 홀대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마초는 221년 표기장군, 영(領) 양주목
으로 승격되어 임명된 기록이 있다.
이 양주목(양주자사) 자리는 촉한에서
북벌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수들이 받은
작위인데, 훗날 촉한 군부의 핵심이 되는
위연과 강유가 받은 작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도 양주자사직을 받았을 뿐
양주목 직위를 받지는 못했다. 제갈량의
'영 익주목'과 더불어 목에 임명된 것이었는데
유비가 마초를 홀대하지 않았음을 증빙하는
유력한 자료이며, 유비의 표문을 봐도 드러난다.
짐이 부덕(不德)하나 지존(至尊)의 자리를 이어
종묘를 봉승(奉承)하게 되었다. 조조(曹操) 부자(父子)가
대대로 죄가 가득하니 짐은 참달(慘怛-참담하고 비통함)하여
열병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하구나. 해내(海內)가 원망하고
분노하여 정(正)에 귀의하고 본(本)으로 되돌아오고
저(氐), 강(羌)이 솔복(率服-잇따르며 와서 복종함)하고
훈육(獯鬻- 흉노)이 의(義)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대는 북토(北土)에 신의를 드날리고 위무(威武-위엄과 무력)
또한 아울러 빛났도다. 이로써 그대에게 임무를 맡기니
효호(虓虎-포효하는 범)의 위용을 높게 드날려 만 리 밖까지
겸하여 바로잡고 백성들의 아픔을 구하도록 하라.
장차 조정의 교화를 밝히고 베풀어 멀고 가까운 이들을 품어
보호하고 상벌을 엄숙하게 삼가고 한나라의 복운을
두텁게 하여 천하의 기대에 보답하도록 하라.
강, 저가 복종하고 있고, 흉노 및 북쪽지방에 대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며 마초를 칭찬하고 그를
북방에 배치하여 그들을 품고 위무하라는 것인데
마초는 이릉대전에 참가하지 않고 서북방에 위치,
혹시라도 있을 이민족과 위의 침입을 방지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는 제갈량을 성도에 남기고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는데
군주가 친정을 나설때 2인자에게
본진을 맡기고 가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초도 북방에 배치했고
조운은 유비가 직접 강주에 배치하여
후방을 감독하게 한 이상 사방장군은
모두 없고, 조운도 쓸 수 없는 상황...
당연히 군사적으로 좋지 않았고
대내외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신하들도 거의 대부분이 반대했다.
그럼에도 유비는 정벌에 나섰다.

형주는 유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때문에 본인이 제일 믿고 부리는 관우를 남겨
이곳을 맡아 다스리게 했고, 동오와 손권과의
갈등을 감수하면서 절반이나마 형주를 확보해
이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형주의 상실은 촉한이 익주에 갇힌다는 것과
같았다. 융중초에서 제갈량이 제시했던 촉의
원대한 꿈, 천하삼분지계의 기본 그림이 아예
박살난 것과 다름 없었다. 북벌로가 옹양주
방면 하나로 한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상용도 상실한 이상, 더더욱 그랬다.
이 상황 역시 고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는 합리적이지 않은 결정이었다.
촉의 신하들도 반대했을 뿐더러, 타국에서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황제로 즉위한 조비는 조칙으로 모든 신하들에게
유비가 오나라에 보복전을 펼칠 가능성이 있는지
의견을 구했는데, 당시 위의 신료는 촉의 국력과
형주상실로 인한 타격, 패배를 겪은 국가의 상황
여러가지의 상당히 객관적인 요인을 들어 분석,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리라 예측하였다.
허나 유엽만은 두 가지의 논조로 유비의 원정을 예측하였다.
첫째는 촉이 비록 국토도 좁고 세력도 약하지만 유비는
강인한 인물이므로 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부자 사이나 다름없으므로, 복수를 위해 출병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엽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삼국전투기에서 나온 이릉대전 직전 묘사.
유비의 심정이 정말 이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잘 묘사한 명장면이라고 본다.
인간 유비와 군주 유비는 달랐어야 했다.
그러나 유비는 마지막에 인간 유비를 선택했다.
오히려 이 때문에 유관장의 의리와 낭만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낭만은 희극이 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을뿐.
그리고 그렇게 촉빠들의 눈물과 탄식의 역사
이릉대전은 막이 오르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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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삼국지 게임때문에 삼국지에 빠져있는데 글이 너무 재밌네요.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