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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대전 - 중(中)

농구와 야구
11
  1489
Updated at 2024-10-20 15:56:36

 

전편에 이어 올려봅니다.

평어체 양해 부탁 드립니다.

 

유비는 본인이 직접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장비를 잃은 이상 촉은 사령관 감이 없어진 상황.

유비는 대도독에 풍습, 전부독에 장남을 임명해

군을 두 사람이 이끌도록 하였고, 마량을 무릉의

오계만으로 파견하여 이민족인 만병들과 우호적

관계를 쌓고 협력을 구하도록 했다.

 

여기서 주목해 볼 점이 있다.

풍습은 형주 남군 출신이고, 장남도 형주 출신으로

무릉으로 파견된 마량도 형주 양양군 의성현 출신.

형주 방면에 있다가 유비가 익주를 얻는 과정에서

익주로 들어간 형주계 출신들이었다. 이 세 명뿐

아니라 형주계 출신들이 다수 군중에 있었다는게

자료를 통해 드러나는데, 이를 통해서 유비가 

동오 원정에 형주계를 다수 동원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형주계 출신이 다수 동원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우선 고향을 찾는다는 동기부여를 확보할 수

있는 동시에, 그곳 출신들이기에 지리와 정세에

상대적으로 더 밝아 공략에 잇점이 있다는 점.

또 익주계에 비해 유비와 함께 한 기간이 더

길어서 신뢰 관계가 있고 더 잘 쓰고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유비가 원정군의 다수를 형주계

출신으로 구성하여 꾸린 것으로 보인다.

 

이 형주계 출신 인재들은 유비가 신야에

웅크리며 유표의 비호를 받았을 당시부터

형주 내에서 인재를 포섭하며 호걸들을

불러모으던 시기부터 이어져 온 인재들로

촉한의 전설적인 1세대를 잇는 2세대가

될 포텐과 역량이 있는 인재들로 구성되었다.

 

손권은 제갈근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유비를 말리면서 본인들의 잘못도

없지 않으나 먼저 주적인 조위를

공격할 것을 권유하다가 실패했다.

 

당시 동맹이었던 위에도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으나 위는 알겠다고만

하고 '당연하게도' 건성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221년 8월, 손권은 위에 다시

사신을 보내 스스로 번국을 청하면서

우금을 위로 돌려보냈다. 

우금이 조비를 만난 뒤의 일화는

익히 알려져 있으니 여기선 생략하겠다.

 

오나라 사람들은 왕이라는 직책 따위 받지 말고 

상장군이나 구주백으로 불려야 한다면서 위의

사신을 물리칠 것을 요구했으나 손권은 이를

거절하고 사신으로 온 형정을 접대하며 왕의

작위를 받아들였다. 형정의 무례에 장소가 일갈하고

서성은 주위장수들을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분해하니 형정은 동오가 단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잠시 숙일 뿐 오래 위의 밑에 있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조비는 사신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작두향과

큰 조개, 맑은 구슬, 상아, 물소 뿔, 대모, 공작, 비취,

싸움 오리, 장명계 등을 오에 요구했다. 이는 당시

매우 귀한 사치품들로,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이었다.

조비는 일부러 이를 요구하며 손권과 동오의 태도를

시험하려 했던 것.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치품의 요구에 다른 신하들은 

사치품의 요구양이 예법에도 맞지 않는다며 반발하였으나,

손권은 조비를 두고 근본적으로 예의를 모르는 인간이라

예의를 가지고 따져도 의미 없다는 말과 함께

조비가 요구한 모든 공물을 갖추어서 보냈다.

 

조비는 이 공물을 받고, 어차피 촉과 오가

싸우는 일이니 자국에 해가 될 일이 없다

여겨 전세를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그 사이 유비는 계속 진군해오고 있었다.

 

촉군은 국경지대인 무현과 자귀까지

큰 무리 없이 진군하는데 성공했다.

의도군 서쪽인 무현과 자귀현에 주둔해

있던 육손, 이이, 유아는 풍습과 장남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뒤 후퇴했다.

 

초전에서 승리를 거둔 유비는 자귀로

병력을 내보냈는데 자귀로 나간 병력은

4만으로, 유비는 자귀로 병력을 내보내며

무릉으로 마량을 파견해 오계만이에

있는 만병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초전에서 동오는 패배를 당했다.

자귀가 함락되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아 주연, 한당, 서성, 송겸, 반장, 손환, 송겸 등

오나라의 주력 장수들을 5만의 병력과 함께

육손의 휘하로 배치해 유비를 막도록 지시했다.

 

풍습과 장남의 무현/자귀의 승리로

유비는 동쪽으로 나가는 진격로를 확보했고

오계만이의 지원도 순조로이 받아내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럼에도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이릉대전 - 중(中)

 

붉은 색으로 표기한 유비의 진격로를 보면

익주에서 형주로 나가는 길은 험한 산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 원정 거리도 상당히

길어, 보급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저 지형은 동오가 촉으로 쉽사리 들어오지

못하는 장점도 있었으나, 반대로 촉이 형주로

진출하려 할 때 장애물로도 작용하는 요소였다.

 

또 다른 문제는 수군이었다.

형주를 되찾고 안정적인 보급을 하기 위해선

수군이 안정적으로 육군을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했다.

그러나 유비군 내 최고의 수군 전문가였던

관우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형주의 수군은

이미 패배 후 해체되거나 동오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 뒤였기 때문에 촉한은 수군이

동오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었고,

애초에 동오가 지형 특성상 수군에 압도적

우위가 있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유비는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사용했다.

병력의 규모는 촉이 더 많았지만, 확실하게

육손의 동오군을 밀어낼 정도로 병력이

우월하게 많은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 컸고,

저 늘어진 보급로를 유지하고 병력충원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혹여 만일의

경우, 전선이 밀리거나 후퇴하게 될 것도

고려한 결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수군은 애초에 수로를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육군보다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육군에게 보조를 맞추는 역할을 하여 함께

운용하게 될 경우 속도의 이점을 살리기가

어려워지게 되는데 유비군이 딱 그랬다.

 

거기에 유비가 믿었던 또 하나의 카드

이민족의 무릉만 역시 손권은 손을 썼다.

보즐로 하여금 교주에서 모아온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익양으로 움직이도록 하여

무릉만이의 움직임을 견제했는데, 이것은

성공적으로 작동하여 만족들은 쉽사리

유비를 지원하러 움직이지 못했다.

 

이릉대전 - 중(中)

거기에 초전의 승리 후에 전쟁 상황도

신통치 않았는데 222년 정월에는 오의 장수

송겸이 촉한의 주둔지 다섯 곳을 모두 격파, 

함락시키고 그 장수들을 참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초전의 기세를 바탕으로

형주로 진공하여 진출하려던 촉한의 계획은

실패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비는

자귀로 돌아와 오반과 진식이 이끄는 수군으로

하여금 의도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성공하면서 촉군은 원정을

시작한지 약 반년 만에 비로소 오나라의 최전선이자

강릉으로 갈 수 있는 관문인 요충지 이릉을 점거했다.

 

222년 2월, 자귀에서 유비가 남하하여 형주 전선에

직접 참전하려고 하자, 유비의 참모 황권은 동오의

전투력이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며, 장강의 수로를

타고 내려가는 진로는 물살을 타고 나아가기가 쉽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해야 할 때에는 되려 물살을

거슬러야 하는 탓에 진퇴의 차이가 크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그는 이러한 형세에 최고사령관인 유비가

지속적으로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으니,

자신이 직접 선봉이 되어 싸우겠다는 간언을 내놓았다.

황권의 발언은 본대가 적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상황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릉을 넘어선

지역에서의 원정 실패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혹여 실패했을 시에는 본인이

독박을 쓰고 막아내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황권의 이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이 발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남하했다. 유비 입장에서 황권은

전투 방면으로 능력이 없지는 않다지만

선봉으로 나서 싸우기엔 황권 본인 말따마나

만만치 않은 동오의 군대와 맞서 우위를

점하기엔 탐탁치 않았을 것이라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차라리 평생을 중국 전역의 전장에서

싸워왔던 유비 본인이 군사지휘관으론

역량이 훨씬 뛰어났을것이고, 그렇기에

유비는 본인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릉대전 - 중(中)

 

그리고 유비는 선봉을 청한 황권의 청을

물리쳤지만, 진북장군으로 삼아서 장강

북쪽에 있는 여러 군사를 감독하게 했다.

북쪽에 있었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한

이유에 대해 선주전에선 '이릉도(夷陵道)에서 오군과

서로 맞서게 했다.'로 기술하고 있지만 <황권전>에서는

'강북의 군대를 통솔하여 위나라 군대를 막도록 했다'로

기술하고 있다. 두 서술이 충돌하는데, 이릉도에서 

오군이 배후를 끊는 것을 막는 것과 동시에

북쪽의 위군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 양 쪽을

모두 고려한 결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나라와 손을 잡은 위나라의 배후침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곳을 방어할 믿을 만한 유비의

카드는 황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비는 위와 오 양 군을 모두 상대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는 자리, 관우와 비슷한 상황의 위치를

황권에게 맡겼는데 그가 황권을 얼마나 신임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릉대전 후반부에 황권이 위기의

상황에 처하자 취한 행동을 보면😭

이 부분은 추후에 서술해 보겠다............

 

황권을 파견한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의도군 이도현 효정(猇亭)에 이동하여 주둔했다. 

대치가 길어지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도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확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손권이 2월에 조비에게 직접 보낸 상소에서는

유비가 갈라진 무리 4만 명과 2, 3천 필의 말을

이끌고 자귀를 출발했다고 썼다. 여기서 유비의

군세 배치를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릉에 이르는 진영을 구축한 오반과 진식의 수군, 

효정까지 진출한 본군 4만 명과 다시 이릉에서부터

효정에 이르는 진영, 진지를 구축하여 그 진지에

배치한 후방 배치 병력으로 나뉘어 배치된 것.

 

여기에 유비에게 뜻밖의 횡재도 함께 찾아왔다.

나서지 말고 존버하라는 육손의 명을 거역하고

유비의 살랑거리는 꾀임에 낚여서 독자적으로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한 동오의 장수가 나왔으니

손환이 군을 이끌고 나왔고, 유비는 먹임직스러운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물어버렸다.

 

대패한 손환은 가까스로 퇴각했으나 추격해온

촉군을 피해 이도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승세를

몰아 진격해 온 촉군은 이도성을 포위해버렸다.

손환은 손씨 일족, 때문에 동오의 장수들은 

육손에게 손환을 구출해야 할 것을 진언했으나

육손은 매몰차게 이를 거절하며 손환을 버렸다.

그런데 손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이도성에서 구원이 없는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끈덕지게 버티면서 촉군을 묶어놓고 있었다.......

 

이릉대전 - 중(中)

 

이릉은 장강을 낀 지역인데, 기록상 유비는 강가에 마주한

산지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유비가 군을 강가에 배치한

정황은 뒤에 적겠지만 육손이 공격할 때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을 놓았다는 구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으며,

문제기에서 조비의 발언 역시 강에 길게 이어진 영채들을

언급함으로서 강 전체의 요새화와 주둔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익주에서 자귀까지 나가는 길은 외길이며, 장강의 흐름

때문에 형성된 골짜기다. 여기서 다시 자귀에서 이릉까지

나가는 길 역시 장강의 흐름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 거점들은 본질적으로 장강의 흐름을 따라 형성된

거점이기 때문이었다.

 

형주 상실 당시 수군을 상실한 촉의 입장에서는

만약 오군이 자귀 북쪽이나 장강 남변으로 돌아서

어복에서 자귀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끊기라도 하면

대응할 여력이 없고, 유비는 일단 보급선에 병력을

충분히 배치하여 보급로 차단을 방지하고, 상대가

우회하여 병력을 파병해도 산지에 기대어 방어가

가능하게끔 이들을 산지에 주둔시킨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무릉만이들을 이도 쪽으로 동원하여 장강

남변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게 하는 동시에

본군은 효정에 놓고, 황권의 분대는 위나라와

맞닿는 임저쪽에 놓아 혹시라도 모를 위군을

방어하는 것이 유비군의 계획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유비의 배치는 이 최대 성과를 거둔

시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여 육군과 수군이 서로 최대한 지원,

수군의 속도의 잇점을 포기하면서까지 고집한

수륙양진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수군은 작전을 포기하고 진식의 지휘 아래 

진격을 하지 않았으며, 일부는 해체되면서

오반의 지휘하에 유비를 따라 전방에 위치한

효정 방면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동안 운용했던 수군을 반쯤 포기했단 뜻.

이는 수군이 독자적인 단위로 활동을 포기하고

이도 등을 함락시키기 위해 선봉의 육군전력을

강화하려고 전환되고 나머지는 이릉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이후 기록에서

수군의 기록은 마안산의 수군 격파 기사와

자귀의 배를 버렸다는 기사가 나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일까.

<선주전>에선 이릉 양안에 수군이 주둔한다는 기록

이후 패퇴할 때까지 수군의 기록이 끊긴다.

<육손전>에는 유비가 이릉을 넘어온 시점부터

수륙병진을 포기하고 배를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육손은 이러한 정황이 달라질 수 없다고

평가를 내렸다. 육손 입장에선 대처하기 쉬워진 것.

 

수군이 완전히 해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후에 적겠지만 육손의 역습 당시 수군의 피해가

확인이 되기 때문에 모든 선박이 문자 그대로

버려지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각 진지에 분산배속되어 연락/보급 등의 역할을 맡아

통합된 '수군'으로서 활동할 여력을 잃었거나, 혹은

이릉에서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박들이 주둔한 상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촉의 군대가 문제점이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육군과 수군을 동시에

효율적으로 다루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장비의 부재가 여기서 매우 뼈아프다고

할 수 있는데 만일 그가 사령관으로

살아 있었다면 장비가 전방에 위치하고

유비가 이릉 방면에 주둔하며 후방을 맡아

이릉의 수군을 유지하면서 연계하는 것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촉군에서 가장 숙련된 야전사령관은

다름아닌 군주 유비였다. 때문에 지휘부가

직접 전방에 나가 있을 수밖에 없던 상황.

당시의 촉군은 총사령관인 유비가 전방에서

공격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효정에 주둔하여

적어도 손환이 몇달은 존버하고 있던 이도성을

공략하고 있었으며 수군은 일부는 전방에 있는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환되고 나머진 효정에서

육군과 함께 공격하며 수로를 지키기보단

후방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유비는 수륙병진을 포기하면서까지 포위망을

강화하여 확보한 영역을 굳건하게 지키는

동시에 형주로 진공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것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굳히기' 였다.

이릉과 이도를 유리한 형국에 놓은 이상

육손이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 경우

손환이 존버하는 이도성은 언젠가 결국

무너질 것이고, 포위망이 형성된 이릉 역시

온전히 촉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요충지를 선점하고 산과 강을 끼고 지형의

우위를 확보한 유비군의 형세를 보면서

동오의 제장들은 더 이상 촉의 방어태세가

굳어지기 전에 타격하여 선제적으로 이를

무너뜨려야 함을 수차례 육손에게 진언했으나

육손은 모든 장수들의 진언에 무시로 일관했다.

 

당시 육손의 부장으로 종군한 주연, 반당, 서성

한당 등은 모두 유비를 빠르게 격파하길 바랐으며

이에 응하지 않은 육손이 유비를 두려워한다고

여겨 원망했다. 그러나 대도독인 육손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관망하고 있었다.

 

이를 참지 못한 손환이 뛰쳐나가 유비에게

역공을 얻어맏고 위기에 처하자, 장수들은

손환을 구해야 한다며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육손은 장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강력히 고수했다.

 

이에 불만이 폭발한 장수들은 육손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기에 육손이 칼을 잡고 강경하게 나와야 할 정도였다.

<육손전>에 따르자면, 육손은 (유비군이 다다른) 이릉은

나라의 최전선에 있는 관문일 뿐이며, 분명 요충지지만

그 자체로서는 언제건 함락될 수도, 함락 당할 수도 있는

입구일 뿐이라는 자세를 견지했다.

따라서 아직 오나라의 초입에 도달했을 뿐인, 

더군다나 험지에 주둔한 촉군에게 오군이 먼저

공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육손은 이릉은 이도까지 얻어야 의미가 있는 점령지라고

파악하고 손환이 수개월 포위되어 있는 이도가 버틸 것을

자신했으며, 성이 견고하고 식량도 충분하며 손환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했으므로 이러한 자신감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손환은

실제로 이도성에서 끈덕지게 정말 잘 버텼다.

 

지원이 가능한 안정된 배후지가 있는 상황에서

형주의 거점들이 육로로 함락된 사례는 없었다.

육손은 지형에 기댄 촉군에 말려드는 일이 불필요하며,

공격하면 산지의 지형상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수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평야에서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할 일을 

경계했는데, 이 중 후자는 특히 이도를 포위한 촉군에

직접적으로 말려드는 일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비가 가장 원했던 전투 구도도 이 쪽이었다.

 

촉군에는 적어도 2~3천 필의 말이 있었고 이는

기병전력이 몇천 단위로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릉대전 관련 기록에선 오나라의 기병전력이

나오지 않는데 만약 오군의 기병전력이 부족했다면 

개활지에서 상대편에 기병이 몇천 정도 있다는 점

역시 껄끄러운 요소였을 것이다. 

 

대치가 길어지자, 유비군은 형세의 유리함을

믿고 늘어지기 시작했고 초전의 날카로운

기세를 상실했으며, 온갖 도발에도 동오군이

움직이지 않자 효정에 있던 촉군의 대독 풍습은

육손이 별것 아닌 인물이라 여기고 은연중에

방심과 오만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비는 무협과 건평에서 이릉 경계까지 둔영

50여개를 설치하여 포위망을 강화하는 동시에

영역을 길게 늘어트려 확보했다. 이 과정을

육손은 계속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육손의 평가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촉군은

배를 버리고 도보로 진지를 만든 상황이었고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해질' 정도로

대치하면서 둔중해졌다고 기록한다.

 

육손의 전략은 맞아 떨어져, 그의 전략에 의하여 

오의 영토 내로 5, 6백 리를 들어온 촉군은 장강을

따라서 전군과 후군이 7백 리나 되는 긴 전선을 형성했다.

이 사실을 들은 조비는 유비가 병법을 모르며, 7백리 군영으로 

적을 막을 수 없고 고원, 습지, 험한 곳 등 장애가 있는 곳에

군영을 설치하는 일은 쉽게 포위당하기에 병법에서

금하는 바라며 유비를 비판했다

 

전쟁 발발 후 약 1년여가 지난 222년 6월경, 효정에서

2월부터 오군과 대치하고 있던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 명의

군사만을 주어 평지에 진영을 새로이 세우게 하고

육손을 유인했다. 다른 동오 장수들은 모두 공격을 주장했는데,

육손만은 유비가 산골짜기에 복병을 둔 것을 간파하여

공격하지 않고 버텼다. 이에 장수들은 또 불평했다.

결국 유인계에 육손이 걸려들지 않자,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왔다.

이는 육손에게 그대로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매의 눈으로 계속

주시하고 있던 동오의 대도독 육손은 

촉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이릉은 요충지이며 나라의 최전선에 있는 관문인데,

비록 쉽게 얻긴 했지만 역시 또 쉽게 잃게 됩니다.

그곳을 잃게 되면 한 군의 토지를 손실할 뿐만 아니라

형주를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곳을 다투어 틀림없이 성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비는 통상적인 이치를 어기고 자신의 집을 지키지 않고

과감히 보냈습니다. 

신은 비록 재능은 없지만, 

폐하의 위엄과 명성에 기대어 순리를 따라서 거역하는 자를

토벌하고 짧은 시간에 파괴했습니다.

유비가 앞뒤로 군사를  사용한 것을 살펴보면,

실패는 많았고 성공은 적었으므로, 

이로부터 걱정할 가치가 없다고 추단했던 것입니다.

신은 처음에는 그가 물과 육지로 함께 진출할 것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부서를 살펴보았지만, 다른 변화는 반드시 있을 수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베개를 높이 베고 이일에 괘념치 않기를 드려 원합니다.

 

육손이 손권에게 보낸 편지 中

 

촉빠들에게 있어선 비극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4
댓글
Art_Basketball
2024-10-20 16:14:56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Hinrich
2024-10-21 00:07:37

재밌지만 참 마음이 답답한.. 글 감사합니다.

CROWN
2024-10-21 01:06:32

유비에게 가장 첫번째 실패는 손환을 박살내놓고 결국 성 함락까지 가지 못했다는 점이지요. 

이게 스노우 볼이 굴러서 육해 병진을 하지 못하고 진영이 길게 늘어나게되고, 결국.... ㅠㅜ

바이스시티
Updated at 2025-02-24 13:29:13

마지막에 육손의 편지에서 읽혀지는 근거있는 자신감이 존멋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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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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